제목: 
나의 발레는 여전히 클라이맥스다
작성일: 
2013-02-27 오후 3: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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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일본 교토 출생. 가이타니 발레아카데미에서 무용수로 활동했으며 한국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시작해 1996년~2001년까지 단장 및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2008년부터 다시 동직을 맡고 있다. 이외에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정동극장 극장장 등을 역임했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지난 1월 23일 예술의전당에 위치한 국립발레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녀의 춤추는 듯한 손짓, 몸짓에 시선을 빼앗기는 일은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날렵하고 우아하고 아름답다. 몸으로도 말하고 마음으로도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발레에 전율하는 순간’을 상상케 한다. 깊고 빛나는 발레 인생의 리더를 만나보자.

1983년 스물세 살의 촉망받는 발레리나가 트렁크 하나를 들고 한국 땅을 밟았다. 가족과 떨어져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세계로 들어섰지만 발레가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의 이야기다. 재일교포 최초의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 출산 후 복귀한 제1호 발레리나 등 화려한 수식어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왔지만, 무대 아래서 더 넓은 발레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녀에겐 가장 빛나는 절정의 무대다.

발레와의 첫 만남, 동경과 숙명 사이
발레와의 첫 만남은 소녀의 순수한 동경에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집에 혼자 있게 되면 최 단장은 집 앞 영화관에 가서 심심함을 달래곤 했다. 오드리 햅번, 비비안 리를 보며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성상에 매료되어 있던 차에 언니를 따라 발레연구소에 가게 되면서 10살의 소녀는 발레에 사로잡혔다.

“제가 태어난 곳은 무학(舞鶴)이라는 교토의 작은 시골이었는데 이름을 풀이하면 ‘춤출 무, 새 학’이었어요. 새가 춤춘다는 뜻이니 ‘백조의 호수’를 춤추는 것 같죠. 지금 생각하니 뭔가 운명적이었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동경에서 오시는 발레선생님의 자태가 마치 영화에서 본 배우처럼 아름다워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수한 감성은 열정과 집념으로 점점 커져갔다. 연습실 한 면을 꽉 채운 거울은 늘 자기 자신과 대면시켰다. 물론 테크닉도 좋아지지만 외면과 내면의 합일로서의 ‘몸’이 나날이 성숙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스스로를 닦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즐거웠다.

“무대에 섰을 때 긴장감보다는 관객이 저를 보고 있다는 공기 자체가 정말 좋았어요.”
최 단장은 마음의 시차를 훌쩍 뛰어넘은 듯 초심(初心)의 맑은 눈빛으로 그 시절을 회상했다.

언어 없는 예술이라 감사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집시처럼 살았네요.”
최 단장은 발레와 함께라면 경계에서 머뭇거리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 프랑스 유학 때도 한국에 첫발을 내디딜 때도 발레가 있었기에 어느 곳이든 겁내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발레는 새로운 세계로의 안전한 인도,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선사하는 패스포트였다.

언뜻 이율배반적인 것 같지만, ‘집시’라는 표현은  ‘떠남’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정착의 꿈’을 내포하고 있다. 발레에 온전히 몰입했던 젊은 발레리나는 일본 국적 대신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일본 문화청의 국비장학생 선발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 때 정체성이라는 거대한 산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하지만 혼란과 허탈감에 자신의 생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대신 뜨거운 한철을 견뎌내기로 결심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일본에 없는 국립발레단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매우 고무적이었고 그녀를 따뜻하게 환대해준 고(故) 임성남 초대 단장이 큰 힘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정착하는 시간 동안 왜 홀로 눈물 흘릴 일이 없었겠는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외로운 치열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언어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발레란 예술을 배운 것이 항상 감사했어요. 발레가 없었다면 이렇게 제가 최태지로서 살 수 있었을까. 정체성도 못 갖지 않았을까…. 트렁크 하나 들고 한국에 왔을 때 금방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서로가 발레라는 몸의 언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죠. 제가 한국 사람으로서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발레 덕분이에요.”

정동극장 극장장에 임명됐던 시기에도 발레를 통해 고국을 알게 되고 발레를 떠나서도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무용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감사했다. 최태지 단장에게 발레는 ‘춤을 추는’과 ‘몸으로 말하는’의 동격이며 지금은 ‘한국을 알리는’이라는 의미로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한국 발레를 나누는 100년을 꿈꾼다
지난해 국립발레단 창단 50주년의 기념 슬로건은 ‘50년의 꿈, 100년의 감동’이다. 지난 50년간 한국 발레의 꿈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왔다면 앞으로의 100년은 세계 속에서 한국 발레를 나누고자 하는 지향점을 담고 있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등 지금까지는 선진국을 타깃으로 열심히 달려왔어요. 역사가 깊은 문화 선진국과의 교류도 의미 있지만, 우리가 경제 강국이 된 지금은 이제까지 많이 배운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국립발레단은 최근 캄보디아에서 발레 콘서트와 ‘찾아가는 발레 교실’을 열어 발레 불모지에 소중한 발레의 씨앗을 뿌렸다. ‘플리에’나 ‘아라베스크’ 같은, 낯설지만 이름부터 근사한 발레 동작을 접한 아이들은 발레와의 첫 만남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누군가는 그 옛날의 최 단장처럼 아름답고 멋진 자태를 꿈꾸며 스스로의 몸을 확장시켜나갈 각오를 하지 않았을까.

국립발레단은 국내의 소외된 곳들을 찾아가는 데도 열심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몸이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거나 부유하거나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가 되어 똑같은 사람으로서 같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국립단체라면 그러한 무대를 많이 만들어 드려야 하는 책임이 있죠.”

최 단장은 누구보다 발레의 대중화에 공을 세운 인물로 꼽힌다.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해 금탑 속 발레를 대중의 곁으로 이끌어냈고 발레단 아카데미에서 일반 클래스를 오픈해 발레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발레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고가 티켓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2, 3천 원부터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티켓 정책을 만드는가 하면 스타마케팅을 통해 김주원 등의 빛나는 스타들을 배출시키기도 했다. 한국 발레 역사상 전석 매진 사례와 같은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그동안 대중들은 발레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어려웠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발레의 값어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가치를 느낄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은 발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였는지도 모른다. 

후회 없이 불태우는 마지막이란 각오
‘해설이 있는 발레’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후배 무용수들에게 많은 무대 경험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36세에 처음 단장이 되었을 당시 최 단장의 결심은 “내가 발레단 단원일 때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을 해주자”는 것이었다.

이 간단명료한 문장 하나에 마음을 담아 ‘단원과 관객이 원하는 것’을 고민하는 리더로서의 외연을 넓히면서 후배들에게 “인생의 멘토 같은 분”이라는 칭송을 받는 리더가 되었고, 지난해 말엔 직업발레단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발레협회로부터 발레CEO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녀지만 리더로서의 진면목을 칭찬하자 유독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저는 전략도 없고 제대로 경영자 코스를 밟은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선배들이 고생하면서 못했던 일들을 한 페이지씩 열어가고, 후배들이 다시 저와 같은 역할을 맡았을 때 남은 과제들을 다음 후배들을 위해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역사가 되면 좋겠어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멘토요.”
고도의 발레 테크닉 같은 전략적 답변을 기대했다면 조금 허망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이번엔 듣는 쪽이 저절로 겸손해진다.

“지금까지 단원과 관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발레단을 이끌어왔어요. 어제보다 오늘 조금 좋아지면 좋고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좋아지면 좋겠어요.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되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걸 알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해야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약속은 지켜야겠죠. 이루고 싶은 꿈들이 있지만 저는 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일하고 있어요. 내일 당장 그만두라고 해도 ‘네, 알겠습니다’라며 물러설 수 있는 각오. 하루하루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제가 각오하는 최선이에요.”

발레가 들려주는 내면의 이야기
최 단장은 무대 위 프리마 발레리나와 무대 아래 예술감독 사이에서 누구보다 ‘소통’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다. 그 소통이 내면의 진실한 고백에서 비롯된다는 것 역시.
“아름다운 바비 인형 같은 몸매와 스포츠만큼의 화려한 테크닉은 기본이에요. 그 다음은 음악적인 면이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표현이에요. 똑같은 ‘백조의 호수’도 누구의 백조냐에 따라 다 달라져요. 내면이 다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죠. 몸으로 똑같은 동작 하나를 해도 부드럽게 또는 강하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내면이 다 보여요.”

의외로 발레는 공연 도중 언제라도 박수를 쳐도 되는 쿨한 예술이다. 감동을 받을 때마다 박수를 치고 브라보를 외쳐도 된다. 흠모하는 관객에 도도한 시선을 던지는 예술이란 편견이 보기 좋게 무너졌다.

“발레는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예술이에요. 그리고 관객의 마음에 따라 행복지수가 달라지죠.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현실,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하는 현실이잖아요. 강한 척해야 하는. 그런데 무대에서만큼은 무용수도 자기 마음속의 감정을 꺼내고, 관객도 현실을 잊고 한순간 내면의 감정에 빠져들 수 있어요. 어렵게 봐야 한다 생각하지 마시고 현실 속의 자기 자신을 털어낸다고 생각하면 더욱 행복해질 수 있어요.”

발레도 경영도 중요한 것은 ‘밸런스’
한순간 자기 자신을 잊음으로써 내면과 만나게 되는 신비한 체험은 이 시대를 사는 리더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실제로 국립발레단 아카데미의 성인반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회 지도층도 포함되어 있다.

“아침에 거울 앞에 서면 어제 되던 테크닉도 중심이 흐트러질 수 있어요. 발레는 자기 몸속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한쪽 어깨가 떨어져도 안 되고 틀어져도 안 되고, 그래서 항상 바를 잡고 중심을 맞추죠. 밸런스는 자기 주관으로만 서 있으면 깨지게 되어 있어요. 사회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데 내 마음 같지 않은 이들까지 다 자기 그릇에 담아 이끌어가려면 밸런스가 필요하죠. 늘 거울 속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실게임도 해보고 자기 자신을 컨트롤한다면 회사 경영에서도 밸런스를 찾아나갈 수 있을 거예요.” 

최 단장에겐 아직 특유의 억양이 남아 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말을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법, 감정을 표현하는 법이 남다르다. 눈짓, 몸짓으로도 말을 하는 예술가적 기질이 묻어난다. 유창한 달변가라기보다 내면에서 진심을 캐내는 연금술사에 가깝다.

최 단장은 자신의 삶에 대해 “50세에 이르기까지 길이 열리는 대로 왔다면 50세가 되어서는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말한다. 그랬기에 2008년 국립발레단 단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동극장장 임기가 남은 상황에서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국립발레단 공모에 응모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발레의 발전을 위해 더욱 고개 숙여 열심히 일하고 싶다는 진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발레리나로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했던 긴장감에서 조금 풀어질 법도 한데 매일 발레에 헌신하기를 각오하는 최태지 단장.
“단장이 되자마자 되도록 발레를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옛날 추억에 빠질까봐. 경영자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도 역시 무대 위 단원들을 보면서 항상 무용에 빠져 있죠.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가면 저는 무대 아래서 함께 춤을 춰요.”
여전히 클라이맥스를 사는 그녀에게 브라보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 출처 : 월간 CHIEF EXECUTIVE 2013년 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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