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하면 연상되는 기업은 수없이 많지만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기업’ 하면 떠오르는 기업은 단 하나 ASML이다. 창립 초 지속된 적자에 생존조차 불투명하던 기업은 어떻게 반도체 산업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ASML의 핵심 경쟁력을 통해 장비 산업의 미래 방향성을 살펴본다.
반도체가 전쟁 국면에 돌입했다. 미국 정부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국제 분업화된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과거 미국 등 서방 국가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국가 운영체제의 변화로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중국은 강력해진 경제력으로 세계를 위협하고 주변국을 자국의 위계질서 속에 편입하려 했다. 이에 미국은 자유시장경제의 새로운 위협이 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전략 물자인 반도체 생산장비의 중국 유입을 막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네덜란드의 ASML이라는 회사와 ‘극자외선 노광장비(EUV Lithography)’가 연일 언론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노광장비는 반도체 설계 정보를 실리콘 웨이퍼 위에 새겨 넣는 데 필요한 장치다.
특히 EUV는 7㎚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장비로 ASML만 생산 가능하다. 대당 가격이 2000억 원이지만 이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삼성전자, TSMC 같은 반도체 회사가 줄을 서고 있다.
1990년대 노광장비의 강자는 일본의 니콘과 캐논이었다. 하지만 2021년 기준 ASML이 노광장비 시장의 95%(금액 기준)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일본에서는 ASML의 경쟁력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반도체 패권이 일본에서 한국과 대만으로 넘어간 가운데 일본이 자랑하는 소재·부품·장비, 즉 소부장 산업 중 핵심인 노광장비마저 네덜란드 기업에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1984년 설립된 ASML은 어떤 경쟁력이 있기에 짧은 시기에 독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까. 장비 산업을 발전시켜야 할 한국은 ASML이 어떻게 니콘과 캐논을 이겼는지 살펴봐야 한다. ASML의 설립 과정부터 ASML을 성장시킨 주요 기술 그리고 핵심 경쟁력에 대해서 알아보자.
ASML의 역사와 노광기 기술ASML은 1984년 필립스와 ASM 인터내셔널이 조인트 벤처 형태로 설립한 회사다. ASML이 설립될 당시 노광기 시장은 대전환기였다. 즉 노광기 시장의 헤게모니가 미국의 GCA에서 일본의 니콘과 캐논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필립스가 1973년 노광기를 개발했지만 자사에서만 사용하는 수준으로 채산성이 떨어졌다. 따라서 47명의 필립스 기술자가 이동한 ASML이 성공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실제로 ASML은 설립 이후 계속 적자에 허덕였다. 결국 1988년 ASM 인터내셔널은 가지고 있는 지분을 전량 필립스와 은행에 매각하고 철수했다.
이러한 상황에 1987년 대만에서 반도체 파운드리(수탁 생산) 회사 TSMC가 설립됐다. TSMC 또한 필립스의 기술과 자본 출자(27.5% 지분)로 만들어진 회사다. 그러다 보니 ASML은 TSMC와 설립 초기부터 깊은 관계를 맺었다. ASML은 TSMC의 수탁 생산 비즈니스를 충분히 이해하고 생산성을 올리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기술적인 혁신을 이루어 냈다.
반도체 공정 속에서 노광기의 역할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설계자는 설계 정보(회로도)를 만들고 공정 기술자는 설계 정보를 실리콘(반도체) 위에 새겨 넣는 작업을 한다. 이때 설계 정보를 포토 마스크(Photo Mask)에 그려 놓고 노광기로 빛을 통과시켜 실리콘 위에 설계 정보를 새기는 작업, 즉 전사(Transcript) 작업이 필요하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차체의 설계 정보를 금형에 그려 넣는다. 그리고 프레스 안에 상하로 금형을 장착하고 철판을 사이에 둔다. 이후 금형으로 철판을 누르면 철판 형상이 설계자가 의도한 형태로 변경되어 차량 외판이 만들어진다.
반도체 산업에서 노광기는 자동차 산업의 프레스와 비슷하다. 단 프레스는 기계 장치이지만 노광기는 광학, 전기, 기계, 화학 등의 다양한 지식이 요구되며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여기에서 ASML의 기술 혁신이 나타난다. 과거에는 하나의 스테이지에서 계측 검사와 노광 작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ASML은 2001년 듀얼 스테이지 기술을 발명했다. 2개의 스테이지를 만들어 계측 검사를 실시하고 난 뒤에 옆의 스테이지로 옮겨 노광 작업을 하는 것이다. 비어 있는 계측 스테이지에서는 새로운 웨이퍼의 검사를 실시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으로 시간당 웨이퍼 처리량을 기존 50장에서 75~100장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생산성 향상에 목말라 있던 삼성전자, TSMC와 같은 신규 반도체 메이커에게 절실한 기술이었다.
2004년에는 액침(Immersion) 기술을 발명했다. 반도체의 공정 미세화에 대응하기 위해 광원이 렌즈를 통과해 웨이퍼로 전해지는 구간에 공기가 아닌 순수(Pure Water)를 삽입한 것이다. 물의 굴절률을 이용해 해상도(Resolution)를 향상시켰다. 그리고 ASML은 이러한 듀얼 스테이지와 액침 기술을 통해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ASML의 핵심 경쟁력 ASML이 듀얼 스테이지와 액침 기술을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핵심 경쟁력은 부품사와의 공동 개발 체제, 모듈러 설계 능력, 소프트웨어 능력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ASML은 조인트 벤처로 출발하면서 가능하면 전문화된 부품사로부터 조달 받아 전체 시스템을 만든다는 방침을 세웠다. 철저하게 모듈러 설계를 추구한 것이다...